(시리즈1)"불가능 도전 '시베리아 횡단철도' 그 뒤엔 숨은 인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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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1)"불가능 도전 '시베리아 횡단철도' 그 뒤엔 숨은 인재 있었다."
  • 문경춘 한국지사장 mgc3322@daum.net
  • 승인 2020.06.26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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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1891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첫번째 완성
총 길이 9,288.2km(87개 도시 통과)...거대한 대하드라마 완성뒤엔 기막힌 사연 있어
129년 전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현장 모습(프리마미디어 제공)
129년 전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현장 모습(프리마미디어 제공)

프리마미디어 코리아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본사를 두고 있는 프리마미디어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획물에 맞춰 시리즈물로 3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했다.

1.'시리즈1' 에서는 "불가능 도전 '시베리아 횡단철도'...그 뒤엔 숨은 인재 있었다."

2.'시리즈2'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위대한 희생...마지막 장애물 바이칼호수" 

3'시리즈3'는 "트로이카 처럼 달리고 싶은 위대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3회로 나눠 연재할 계획이다. 

 

1.시리즈1 "불가능 도전 시베리아 횡단철도'... 그 뒤엔 숨은 인재 있었다." 

러시아의 힘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와 푸쉬킨,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대문호들을 배출한 것도 러시아의 자랑거리이며, 힘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 할 것 이라고만 생각했던 거대한 역사인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러시아의 거대한 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총 길이 9,288.2km로 무려 87개 도시를 통과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다. 이 같은 거대한 대하드라마가 완성 되는 과정에서 무수한 장애에 부딪쳐 공사가 몇 번이나 중단되는 위기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역사가 완성 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의 기막힌 우연과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인들의 특유한 뚝심 덕분이었다. 그 드라마 한 가운데는 두 명의 러시아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알렉산드르 황제와 세르게이 비테라는 인물이 그 주인공이다. 

129년 전인 1891년 5월 31일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첫번째 완성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관한 법령은 1891년 4월 알렉산더 3세 황제에 의해 만들어 졌다. 블라디보스토크시의 Kuperovskaya Padi지역에서 열린 기공식에는 훗날 러시아 마지막 황제가 되는 Tsarevich Nikolai Aleksandrovich가 참여할 정도로 황제의 관심이 높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프로젝트는 1837년 처음 시작됐다. 러시아-중국 무역의 주요 환승 지점인 카야크타까지 철도를 확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레일은 알렉산더 3세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기로 결정한 125년 전인 1891년에 건설됐다.

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르 3세는 추방 된 수감자, 군인 및 지역 농민을 건설 현장으로 보내는 것 보다 서방 산업가들을 참여시켜 극동 지역에서 외국 자본의 영향력을 증가시켜 나가는 것이 철도 건설을 위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통되기 직전 레일 모습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통되기 직전 레일 모습

공식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의 철도 건설은 1891년 5월 31일에 시작됐다. 도로가 거의 완성됐을 때 하바롭스크와 Sretensk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약 2천km의 공사 구간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건설 현장을 만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아무르 지역의 기후와 지질 조건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1903년 드디어 Sino-Eastern Railway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를 계기로 유럽에 접근 할 수있게됐다.

삽과 맨손으로 8년 간 철도공사를 벌이는 등 열심히 노력한 결과 1915년에 '아무르 철도'가 등장했다. 첼랴빈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까지 1916년에 개통했으며, 시베리아, 트랜스 바이칼, 아무르 및 우수리 철도로 나뉘어졌다.

(거대하고 위대한 시베리아 횡단철도 뒤에는 2명의 러시아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888년 10월 18일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3세와 그 일가족 및 귀족들을 태운 열차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이후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흑해 크림반도에서 휴가를 끝내고 기차를 타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이도 이 기차는 탈선해 전복되고 만다. 

이 사고로 현장에서 무려 20명이 사망하고 어린 공주 '크세냐'도 크게 다쳤다. '크세냐 공주는 그 때 사고로 인해 평생을 꼽추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도 불행중 다행으로 공주 외에 황제와 대부분의 일가족들은 큰 부상없이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

황제 일가족들이 큰 사고를 당했는데도 많은 부상을 입지 않았던 이유는 193cm의 거구이던 알렉산드르 황제의 초인적 힘 덕분이었다고 한다. 사고로 인해 내려앉고 있던 기차 지붕을 온 몸으로 버텨내 황태자를 포함한 황실 가족을 무사히 빠져 나오게 했던 것이다. 온 국민이 신의 가호에 감사드리며 황제를 축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 순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고발생 한 달 전에 있었던 이상한 일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항명에 가까운 행동으로 자신의 심기를 크게 거스른 하찮은 인물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크림반도로 휴가를 떠나는 날 있었던 기막힌 사연)

크림반도로 휴가를 떠나던 9월의 어느 날 황실 기차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오데사라는 지역에서 기차에 임시 동석한 이 지역철도 책임자와 황제의 부관인 귀족들 사이에 언쟁이 붙어 기차가 멈춰선 것이다. 황제가 타고 있는 기차를 일개 지역철도 책임자가 세운다는 것은 당시 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역철도 책임자는 감히 황제의 부관들에게 두가지 이유를 들면서 절대 "기차를 출발 시켜서는 안된다"며 대들고 있었다. 그것도 황제의 눈 앞에서...

첫째 이유는 우선 황제와 같이 기차를 타고 있던 교통부 장관 탑승 차량칸 바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이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 때문일 수도 있기에 당장 운행을 중지하고 본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두번째 문제는 황실 기차는 특별히 증기기관차 2대가 끌고 있었는데, 이 두 기관차를 모두 가동시켜 속도를 낼 경우 탈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참모들과 교통부 장관은 지역철도 책임자인 이 역무원을 반미치광이 취급하며 설득과 위협을 가해 어렵게 상황을 무마한 뒤 목적지로 가기위해 기차를 다시 출발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결국 휴가에서 돌아오던 황제 일행이 대 참사를 당하게 된 것이다.

(4년 뒤에 만난 소동 벌인 역무원 교통부 장관에 전격 발탁...)

이 때 황제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던 그 일개 지역철도 관리는 결국 4년 뒤인 1892년 교통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된다.그리고 정확한 판단력과 배포로 고작 몇 달도 안 돼 러시아 경제 전체를 책임지는 재무장관으로 승진해 무려 11년 동안 염임한다. 그가 바로 세계 경제사에 자주 거론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의 주역인 세르게이 비테(Sergei Vite)다. 아주 우연한 만남에 의해 알렉산드르 3세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꿈을 이루는데 결정적 역활을 할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

(쉽지 않았던 철도 건설, 황제와 비테가 결정적으로 해결...)

당시 러시아 황제에게는 세가지 주요 과제가 있었다. 하나는 쇠망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파이를 둘러싼 열강들의 경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낙후한 극동 시베리아를 개척하는 것이며, 셋째는 철강을 비롯한 제조업 발전을 통해 러시아를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발돋움시키는 기막힌 포석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바로 이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 할 수 있는 기막힌 포석이었다. 1891년 4월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기공식에서 훗 날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황태자 니콜라이를 보냈을 정도로 이 사업에 대한 황제의 관심은 지대했다.

그러나 건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준비 단계에서 부터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우선 현장답사를  마친 기술자들은 "서시베리아는 초원지대인 스탭(Steppe)지역이라 철도 건설이 가능하지만 동시베리아는 쉽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침엽수립대인 타이가의 늪지대와 엄청난 바위더미, 혹독한 기후로 인해 착공 자체가 불가능 하다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이에 황제는 극복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공사 강행을 지시했다. 대부분의 신하가 반대했다. 이같은 이유로 일을 추진하기 힘들어 졌다. 이 때 유일하게 황제를 지지하며 해결책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세르게이 비테였다.

각료들이 공사를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재정 부족이었다. 직전에 크림전쟁으로 이미 반토막이 난 국고가 철도공사로 인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을 때였다.

각료들은 만약 황제가 그래도 공사를 강행한다면 이 사실을 공표하지 말고 진행해 러시아 국채의 가치 급락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다 동쪽에 철도를 개설하면 미국 상품들이 러시아로 들어와 자국 경제를 망칠 가능성이 높다는 여론도 많았다. 길을 낸다면 곡물을 수출하는 서유럽 쪽으로 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황제를 설득했다.

(비테는 각료들의 반대를 일시에 잠재웠다.)

재무부장관 비테는 이 재정 문제를 기발한 아이디어로 해결해 낸다. 반대파들은 꼼짝하지 못한채 그의 주장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외국자본 유치에 성공한 것이다. 금본위제도를 정착시킴으로써 그동안 외자유치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루불화 투기를 일소한 것이다. 

또한 국고를 늘리기 위해 실행한 정책 중 하나가 보드카의 알콜 도수를 40도로 정한 일이었다. 보드카 생산을 국가에서 독점하고 주세를 일률적으로 계산하기 위해 보드카의 알콜 도수를 일괄 규정하는 법을 고안해 낸 사람도 바로 비테였다.

(시리즈 2에 계속)

(러시아 프리마미디어 본사기사와 이대식의 '줌인 러시아'내용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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