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목격...독립문 설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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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목격...독립문 설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 특별전
  • 문경춘 한국지사장 mgc3322@daum.net
  • 승인 2020.10.2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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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호위부대장으로 을미사변 목격...
한.러수교 30주년 기념 특별전..."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
문화재청, 19~11월 11일 까지 덕수궁 중면전에서 전시회 개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몇 안되는 목격자인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그린 경복궁 내 시해장소 지도. 고종에 의해 시위대 부대장으로 임명된 사바틴은 1895년 10월8일 새벽 경복궁에서 숙직하다가 천인공노할 시해사건을 목격했다. (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몇 안되는 목격자인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그린 경복궁 내 시해장소 지도. 고종에 의해 시위대 부대장으로 임명된 사바틴은 1895년 10월8일 새벽 경복궁에서 숙직하다가 천인공노할 시해사건을 목격했다. (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러시아 공사관과 독립문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특별전이 한국에서 열리고 있다. 

문화재청이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 특별전을 다음달 11일 까지 개최할 계획으로 지난 19일 부터 전시회를 시작했다.

사바틴에 대한 얘기 가운데는 러시아 공사관과 독립문을 설계한 것 외 더 주목을 받는것은 명성황후 시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1895년 10얼 8일 새벽 러시아 청년 사바틴은 경복궁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고종의 요청으로 당직을 서고 있었다. 새벽 4시 조선인 부령 이학균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잠을 깬 그의 눈에는 놀랄만한 일이 전개되고 있었다. 무장한 일본군 병사 40~50명이 들이 닥친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어냈다. 더러는 창문 밖으로 내 던지기도 했다. 

일본인을 만나 황후의 거처를 추궁당한 사바틴은 "황후 처소의 뜰에서 목격한 모든 조선인 여성들은 살해됐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나중에 증언했다. 사바틴의 이 구체적인 증언으로 인해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을미사변'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사바틴은 구중궁궐 곳에서 일본인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두 눈우로 지켜보게 됐을까...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1860~1921)이라는 긴 이름의 러시아 건축가가 정확한 본명이다. 한국명(당시 조선)으로는 그의 성 세레딘을 음차해 살덕, 살파정, 살파진, 혹은 살파령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1860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의 몰락한 지주가문에서 태어나 1883년(고종 20년) 23살의 나이에 우연한 기회에 조선땅을 밟았다.

그런데 이름을 거론하긴 했지만 사바틴은 개화기 이후 조선을 드나들었던 다른 유력 서양인에 비해 대중적으로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사바틴은 한국 건축사에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인물이다.

(사바틴은 러시아공사관, 독립문 설계 및 공사에 간여해 한국 근대 건축물에 적잖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 유명한 독립문과 러시아공사관, 덕수궁 정관헌·중명전, 경복궁 관문각, 손탁호텔 등 근대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설계했거나 공사에 간여한 것이 확실 혹은 추정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사교클럽이던 제물포구락부와 1902년 서울 정동에 세워졌던 서양식 호텔이 손탁호텔이다. 이 호텔이 20세기초 유일한 서양식 1급 호텔로 명성을 날렸다. 러시아 공사관은 고종이 아관파천 당시 세자와 함께 1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한 사바틴은 러시아 공사에게 목격담을 증언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황후의 시해 순간은 진술하지 않았다.(|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한 사바틴은 러시아 공사에게 목격담을 증언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황후의 시해 순간은 진술하지 않았다.(|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이 중 지금은 첨탑만 남아있는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은 1890년 건립 당시 미국·영국·프랑스·독일 공사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 건물이다. 아관파천 때(1896년 2월 11일) 세자(뒤의 순종)와 함께 옮겨가 이듬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피신했던 곳이다. 경복궁 내 건청궁에 지은 서양식 서재이자 명성황후가 서양 외교사절을 접대한 관문각 역시 사바틴이 설계했다.

사바틴
사바틴

1897년 청나라의 책봉체제에서 독립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중국 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 자리에 세운 독립문(사적 제23호) 역시 사바틴이 설계하고 작업한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또 고종이 머물던 덕수궁 안에서 커피를 즐기던 곳으로 유명한 정관헌도, 그리고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 체결 장소인 중명전(사적 제124호)도 모두 사바틴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사바틴이 설계한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인 러시아공사관 건물. 1890년 건립 당시 미국·영국·프랑스·독일 공사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쿤스트카메라 박물관·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사바틴이 설계한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인 러시아공사관 건물. 1890년 건립 당시 미국·영국·프랑스·독일 공사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쿤스트카메라 박물관·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고종의 호위 부대장이 되다.)

사바틴은 근대건축사 외에 또다른 역사적인 사건에 이름을 남긴다. 즉 1895년 10월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한 외국인 2명 중 1명이기 때문이다.

사바틴은 1888년(고종 25년) 경복궁 내 관문각 설계 및 감독 계약을 맺고 사업을 진행했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조선관원과의 잦은 불화에 휩싸이고 봉급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사바틴은 급기야 조선을 떠날 마음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사바틴을 만류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고종이었다.

고종은 1894년 7월23일 청일전쟁 직전 경복궁을 무력 점령한 ‘일본의 경복궁 침입사건’ 이후 늘 불안에 시달려왔다. 고종은 1894년 9월부터 미국인 예비역 대령인 윌리엄 맥엔트리 다이(1831~1899)를 경복궁 시위대장으로, 사바틴은 부대장으로 나란히 기용했다. 일본인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외국인들을 시위대장으로 임명해서 일본인들의 궁궐 내 활동을 감시하려 했던 것이다. 예비역 대령인 다이는 그렇다치지만 건축가의 신분인 사바틴에게까지 시위대 지휘를 맡길 정도였으니 고종이 얼마나 불안에 떨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고종의 명에 따라 사바틴은 1894년 9월부터 1주일에 나흘에 걸쳐 저녁 7시에 출근해 아침에 퇴근했다.

독립문
독립문

그러나 잔인무도한 일본인들은 개의치 않았다. 시해사건이 일어난 10월8일 새벽에도 사바틴은 궁궐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새벽 4시쯤 사바틴은 시위대 1대대장인 이학균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을 깬다.

다이와 사바틴이 지휘하는 시위대가 일본 침입자를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시위대원들이 곧 도망쳤지만 사바틴은 명성황후가 기거하고 있던 곤녕합 동행각에서 그 천인공노할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일본 자객 중 4~5명은 칼을 뽑았고, 긴 칼을 차고 단검을 빼든 일본인이 현장을 지휘했다…20~25명 자객들은 곤녕합 마루를 넘어 옥호루, 사시향루, 정시합의 방을 샅샅이 뒤지면서 명성황후를 찾았다.”

사바틴은 “그 과정에서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질질 끌며 왕비의 소재를 추궁했다”고 증언했다.

그 과정에서 자객들은 건천궁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사바틴에게 “왕비가 어디 숨어있는지 알려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간신히 현장을 빠져나온 사바틴은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1841~1910)에게 사건의 전모를 증언했다. 그러나 사바틴은 가장 결정적인 암살과정은 목격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바람에 베베르의 의심을 받았았다.

하지만 관련자료를 발굴해서 단행본(<명성황후 최후의 날-서양인 사바찐이 목격한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억>)을 펴낸 김영수 동북아연구재단 연구위원은 “여러 자료를 토대로 보면 사바틴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순간을 목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장에서 참상을 목격한 사바틴이 만약 사실대로 증언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해

실제 한성신보 편집장이던 고바야카와(小早川秀雄)는 “칼날 번득이고 마당 안팎을 자객들이 우왕좌왕 할 때 러시아인 사바틴이 현장을 목격했다”(<민후암살기>)고 증언했다. 서울주재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도 “궁궐 안에 숙직했던 러시아인 사바틴이 역시 숨어서 이를 지켜보았다”(<주일본공사관기록> 1895년 11월5일)고 했다.

당시 상소재판을 담당한 고등재판소의 기록(‘영문판’)도 사바틴의 목격이 사실이었음을 증거해준다. 최초의 영문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 1896년 3월판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사바틴의 말에 따르면…자객들은 모든 방을 수색한 뒤 왕후 폐하께서 어떤 구석방에 숨어 계신 것을 발견하고 즉시 붙잡아 가지고 있던 칼로 시해하셨다.”

(사바틴 기록 특별전)

특별전은 우선 을미사변의 목격자 ‘사바틴’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을미사변은 앞서 살펴봤듯 1895년(고종 32년) 10월 8일 새벽, 당시 조선 주재 일본공사였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6~1926)를 필두로 한성 주둔 일본군 수비대와 공사 관원, 낭인 집단 등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특별전에는 사바틴이 그린 경복궁 내 명성황후 시해장소 약도와 시해에 대한 사바틴의 증언서(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를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바틴의 활동사항 뿐 아니라, 19세기 중엽~20세기초 1884년 7월 7일 체결된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과 관련된 조러수호통상조약 조선 측 비준문서(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사진이 전시된다. 황후 시해사건 직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시 조선을 떠났다가 1899년 무렵 다시 돌아와 1904년 러일전쟁 후 한반도를 떠나기까지 건축과 토목사업에 참여한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특별전에서는 이어 건축가 사바틴의 대표작인 ‘러시아 공사관’ 건립을 다루고 있다.

특별전에서는 러시아 공사관의 최초 설계안과 준공안을 비교하고 당시 기축통화였던 멕시코 달러로 계산된 견적서 등을 공개한다. 또 준공이 실현되지 못한 대한제국 황제 사저, 공사관 공사 대금을 요청하는 사바틴의 청원서까지 러시아 공사관이 준공되기까지 겪었던 우여곡절과 상세한 공사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사바틴이 설계했거나 공사에 간여한 것이 확실 혹은 추정되는 제물포와 서울(한성)의 건물 12곳 모형과 사진이 전시된다. 그중 사바틴이 관여한 것이 100% 확실한 건물은 관문각과 러시아공사관이다.그 외 사바틴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물포구락부, 독립문, 중명전, 정관헌, 손탁호텔 등 건물의 사진들과 모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 한.러 수교 30주년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볼만한 가치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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